내 마음의 양식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문학중년 2025. 6. 15. 22:54

원래 작년에 이 책을 읽다가 ‘일류의 조건’이라는 책으로 변경했기 때문에 책의 앞부분만 읽고 전체를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12/3 계엄 이후에 급격하게 돌아가는 정치적 상황과 일련의 사태들이 지난 번에 읽었던 앞부분의 내용과 너무나 똑같이 닮아 있었다. 그래서 이 책에 담겨 있는 전체 내용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특히 제목이 많이 와 닿았는데 12/3 이전에 제목을 보았을 때와 그 이후에 보았을 때 마음에 다가오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당시에는 미국의 대통령이 트럼프가 아니었다. 대통령 유세 기간 중에 바이든이 사퇴하면서 해리스가 등장했으나 제대로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다시 선출되는 정말 영화 같은 일이 발생했다. 한국은 그 와중에 12/3 계엄으로 국가와 국민들이 매우 혼란스럽고 어수선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책에서 사례로 들었던 민주주의 위기가 바로 우리들의 눈앞에서 현실로 벌어지고 있었다. 이럴수가… 내가 생에 두 번째 계엄을 목격하게 되다니…

책에 간간히 한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내용은 나쁘지 않다. 직선제를 잘 하고 있는 점, 전직 대통령들이 퇴임 이후에 처벌을 받아도 정치가 안정되어 있다는 점 등 민주주의를 잘 지키고 있다는 좋은 내용들이었다. 저자는 아마도 불과 몇 년 뒤에 한국이 12/3 계엄과 같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일을 겪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이 책의 개정판을 내거나, 그 이후의 이야기가 다시 책으로 나온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했던 12/3 계엄과 그 위기를 극복해 낸 이야기가 반드시 들어갈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생각들이 떠 올랐는데, 그 중 하나가 작년에 미국을 다녀오면서 비행기에서 본 영화인 ‘Civil War’이다. 내용은 대충 헌정을 파괴한 파시스트 극단주의 성향의 3선 대통령이 이끄는 권위주의 미국 연방 정부의 심한 폭정에 반발해서 다른 주들이 연방을 탈퇴하면서 벌이는 내전을 담은 영화다.

이때만 해도 트럼프 때문에 미국은 내전이 발생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막연한 상상(?)만 했었는데 막상 영화로 보니까 정말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날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에서 민병대들이 아시아 이민자를 살해하고 대량 살상을 하는 장면, 연방정부와 반발하는 다른 주들의 전투 등을 보면서 정말 끔찍하다고 느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기 전이었다면 이런 내용의 영화는 등장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 영화를 볼 때만 해도 미국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는데, 12/3 계엄을 겪으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내전이 일어날 뻔 했구나 라는 위기감이 들었다. 극단적인 소수에 의해서 촉발된 계엄과 여러가지 이해할 수 없는 조치들이 왜 우리나라처럼 안정되고 성숙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벌어지는지 정말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마치 전세계에 바이러스라도 퍼져서 트럼프와 같은 극단적인 리더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국, 유럽, 아시아 등에서 극단적인 성향의 정치인들이 등장하는 것이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자주 일어나는 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 미국 생활도 오래하시고 정치에 관해서도 잘 아시는 교수님의 특강을 들은 적이 있었다. 갈라진 미국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많은 이해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예전의 미국은 40대의 젊은 대통령을 선출하고, 무언가 혁신적이고, 선도적이며 왠지 인권을 소중하게 여기고, 도덕적이고(사실은 아니지만), 최소한 민주주의의 종주국(?) 같은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이미지는 진작에 없어진 지 오래고 이익만 쫓는 깡패 같은 느낌이 든다.

당시 교수님께 비슷한 질문을 드렸는데 교수님도 왜 그런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솔직히 말씀하셨고, 그 당시의 궁금함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왜 미국이 그렇게 망가지게 되고, 극도로 이상해 보이는 트럼프가 대통령을 두 번이나 하면서 전세계를 상대로 이상한 짓을 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미국의 민주주의 위기는 단순히 트럼프 개인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으며 구조적인 문제로 꽤나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본다. 트럼프의 공화당은 유럽과는 다르게 급진 우파가 소수로 존재감이 약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정권을 잡으면서 민주주의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현실 세계에서 미국은 정치적 다수가 선거에 이기고도 통치하지 못하는 구조였다.

 

l 민주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

민주주의는 정당이 선거에서 패배하는 시스템이라는 표현이 정말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고, 국민이 정당과 지도자를 선택하는 제도라고만 생각했던 나에게 ‘정당이 선거에서 패배하는 시스템’이라는 표현은 정말 많이 색다르게 다가온다.

정당이 지는 법을 배울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뿌리를 내리며,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릴 때, 정권 교체는 일상적인 일이 되고 국민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규칙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앞으로 다시 승리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 ‘권력 이양이 재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1998년에 한국에서 최초로 정권 교체가 일어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보복이 일어날 것이라고 우려를 했다. 그래서 기존의 기득권층들이 기를 쓰고 다양한 방법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막으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보복은 없었고, 정권이 바뀌어도 안전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당시 나도 처음 정권이 교체되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평화로웠고 전날과 다름없이 흘러갔고 그게 바로 일상이 되었다.

그 뒤로 네 번째의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일어났다. 선거에 이기고 지고, 정권 교체가 일상이 되면서, 앞으로 승리할 기회는 언제든지 있고, 권력 이양이 재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한국 사회에도 뿌리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민주적이었던 집단이 오히려 선거를 부정하고, 쿠데타 등 비민주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예전에 기억나는 태국 뉴스가 있는데, 방콕의 시민들이 쿠데타 군에게 꽃을 전달하는 장면이었다.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국민들이 옹호하는 장면이 당시에는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방콕의 기득권층에 반하는 정책을 펴온 정권에 의해서 태국 중상층들이 쫓겨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민주적 집단이었던 그들이 쿠데타 군을 지지하게 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l 충직한 민주주의자

민주주의에 헌신적인 정치인들과 정치학자 후안 린츠는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언제나 세 가지 기본적인 행동을 실행해야 한다고 한다. 첫째, 승패를 떠나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 둘째,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전략을 분명히 거부해야 한다. 셋째, 반민주주의 세력과 확실하게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가지 기본적인 행동 수칙을 읽는 순간 너무나도 소름이 돋았다. 2023년에 씌여진 이 책이 마치 2024년의 한국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부정선거 음모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정치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서 ‘계엄’이라는 폭력을 사용했고, 외부의 극우 단체들과 관계 맺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사례와 너무도 똑같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종주국과도 같았던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트럼프와 공화당에서 부정선거 음모론을 제기하고, 극우 세력들이 폭력으로 국회 의사당을 점령하려고 할 때 이를 말리기 보다는 부추기고, 재집권한 이후에 폭력을 주도한 단체들의 리더를 칭송하면서 사면하는 등 충직한 민주주의와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다.

 

l 법을 무기로 활용하기

법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애매모호한 부분과 잠재적인 허점을 이용해서 법의 목적 자체를 왜곡하고 뒤집을 수 있다. 한국에서도 이런 사례는 매우 자주 목격할 수 있어서 오죽하면 ‘법을 이용하여 사익을 취하는 무리’라는 뜻의 ‘법비’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고 있을 정도다.

법의 허점을 이용한다든가, 아니면 어떤 법을 과도하거나 부당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법을 외면하거나, 선택적인 법 적용을 통해서 정적을 처벌하는 경우도 있다. 합법적으로 보이지만 오로지 정적을 겨냥하는 측면에서 매우 부당한 방식이다. 또한 자신들을 반대하는 개인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기소를 해서 자살에 이르게 하거나, 구속시키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책에서 소개하는 헝가리의 사례는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독재를 하는 경우를 설명하고 있다. 의회의 2/3를 차지한 뒤 헌법을 원하는 대로 수정하고, 사법부 판사들을 자기 편으로 앉혀서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합법적으로 장악하여 독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책에서는 자세히 언급되지 않지만, 브라질도 비슷한 경우로 입법, 행정, 사법부를 장악한 기득권 세력이 룰라를 비롯한 반대파들을 합법적인 형식으로 구속하고 처벌한 것이 그 사례이다.

명석하고 뛰어난 지능을 좋은 곳에 활용하지 못하고, 이러한 법률적인 허점을 이용해서 구속된 사람을 탈옥시키는 파렴치한 일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있는 한 민주주의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완벽하거나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처음부터 저절로 현재의 민주주의 시스템이 만들어졌던 것이 아니라 미 연방을 유지하기 위한 거래의 산물이거나, 아니면 약자들이 투쟁을 통해서 권리를 쟁취하게 된 것들이 모여서 된 것이다. 그러한 투쟁의 산물중의 하나가 흑인과 여성의 참정권이다.

미국에 이민자들이 증가하고 기독교도들이 줄어들면서 공화당의 핵심 지지층이었던 백인계 기독교인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회의 주류라고 생각했던 본인들이 사회의 소수로 밀려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백인계 기독교인들은 소수 인종을 우대하는 제도 등에 대해서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위기감을 느낀 백인계 기독교인들은 유색인종들의 투표를 어렵게 하는 제도를 밀어붙이기도 하고 위기감을 부추겨서 백인들이 공포감을 느끼게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한 공화당원들이 극단적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무력사용을 찬성하는 분위기로 몰고가기도 했다.

 

l 다수결과 반다수결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이 적용된다. 하지만 소수의 의견이지만 “다수결의 범위를 넘어서” 존재하는 제도가 있다. 그것을 바로 “반다수결주의 제도”라고 한다. 미국은 언제나 반다수결주의 쪽으로 크게 치우쳐 있었고 실제로 이러한 특성은 헌법에 규정되어 있다. 그 이유는 반다수결주의가 다수의 지배와 소수의 권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한 숭고한 노력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변화를 가로막겠다고 위협하는 강력한 소수를 달래기 위한 일련의 구체적인 양보의 타협안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망가진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선거에 이긴 다수에 의해서 통치되지 못하는 것이 가장 커 보인다. 그럼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상원의 거부권과 필리버스터, 그리고 소수 정당이 임명한 종신 대법관의 이슈, 헌법재판소 미 운영, 유권자 수가 아닌 주 별 대등한 투표권에 따른 왜곡 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도들은 정교한 계획이 아니고 미합중국이 만들어질 때 통합을 위해서 인구가 적은 주를 배려하다 보니 생긴 기형적인 제도라고 한다. 예전에 미국의 정치제도를 배울 때 투표자의 의사를 합계하는 것이 아니라 승자 독식이라는 점, 그리고 상원의원의 숫자가 주 별로 동일하다는 점이 의아 했었다. 그래서 표를 많이 얻어도 당선이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에 비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직접투표를 하지 않고 간접선거를 하는 것도 정말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도 과거 군사정부 시절에 간선제로 장충체육관에서 선거를 했었기 때문에 간선제라고 하면 일단 비민주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미국의 소수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는 크게 3가지이다. 승자 독식을 하는 선거인단 제도 때문에 당선되지 않은 사람에게 투표한 사람들의 권리는 묻히게 된다. 두번째는 왜곡된 작은 주 편향이다. 각 주에 할당된 선거인단수는 모두 동일하다, 주가 크건 작건 동일하기 때문에 아무리 큰 주에서 지지를 많이 얻어도 작은 주 몇 개에서 승리하게 되면 동일한 가치의 표를 가져가기 때문에 지지를 많이 획득한 주 수가 많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선거에서 패배한 공화당이 다수당인 민주당을 누르고도 상원, 대법원의 애매한 규정과 반다수결 규정을 적극 활용하여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기존에도 이런 허점이 있었지만 트럼프와 요즘의 공화당처럼 이렇게 적극적으로 허점을 활용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민주주의는 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