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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것이 모두 사실일까?-건축학 개론

문학중년 2012. 5. 1. 22:47

  많은 사람들이 집사람과 보면 안된다고 강하게 충고했다. 나도 가끔씩 만나서 영화만 보는 과동기와 같이 영화를 보려고 했었다. 그러나 어찌하다가 집사람과 같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들은 얘기가 있다보니 신경이 쓰이는건 사실이었지만 그런데 막상 같이 보니 함께 영화를 봐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잊을만하면 첫사랑이 어땠냐고 캐묻는거 빼고는...

  영화는 현재와 1996년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당시 유행했던 옷, 삐삐, CD카세트 등 예전 물건을 보니까 자꾸만 그 시절의 생각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삐삐는 95년도에 신제품 발표회 참석했다가 공짜로 받아서 처음으로 사용했었고, 96년도에는 시티폰이라는 게 나와서 공중전화에 길게 기다리는 사람들 옆에서 폼나게 사용했던 기억이 난다. 96학번들의 사랑이야기, 난 그때 복학생이었는데...

  이제훈과 수지가 과거의 엄태웅, 한가인 역할을 맡았는데, 제법 잘 어울린다. 이제훈은 고지전에서 목숨을 사리지 않던 중대장으로 나와서 매우 인상깊었고, 수지는 미쓰에이에서 가수로만 알았는데 순수하고 청순한 여대생 역할을 아주 잘 보여줬다. 진짜 대학생이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수지 같은 미모와 청순함을 지닌 여자들은 국가차원에서 보호해야 한다. 정말로...

  엄태웅은 이제훈의 현재 모습인데, 서로 잘 어울리지는 않아 보인다. 이제훈이 엄청 고생을 해서 아마 좀 더 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할 듯 하다. 한가인은 정말 예쁘다. 영화에서 술마시고 외치는 욕설도 제법 잘 어울린다. 돌싱으로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제주도에 집을 짓고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그런대로 잘 표현했다. 한가인도 나이를 먹고 있어서 마음이 아프다. 한가인만 보면 잘 못 느끼는데 수지를 보니까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기억은 얼마나 정확할까? 두 사람은 서로가 기억하는 일들에 관해서 과거 시점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풀어낸다. 건축학 개론 수업시간에 각자의 집에서 학교에 오는 길을 표시하다가 우연히 같은 동네 정릉에 산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러다가 동네서도 보고 서로 친해지고, 여기저기 같이 숙제하러 다니기도 하고, 수지의 생일파티를 해주기도 하고, 첫 눈 오는 날 만나자고 이야기도 하고 참 정겹다. 하지만 같이 기억하는 부분의 행복은 거기까지다. 상대방은 모르지만 각자만 알고 있는 기억이 있다. 그 기억 때문에 그들은 오해를 했고, 그 때문에 제대로 좋아한다는 말도 못하고 헤어진다. 15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때 오해했던 부분들이 밝혀지지만, 이미 지나온 시간, 어찌할 수는 없다.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라는 노래가 배경으로 나온 것도 우연만은 아닌듯 하다. 원래 전람회, 김동률의 노래를 좋아했지만 영화의 내용, 아름다운 화면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극장의 잘 갖춰진 스피커에서 울려퍼지는 소리는 마음의 전율을 느끼게 한다.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 속으로 쓰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 너무 커버린 내 미래의 그 꿈들 속으로 잊혀져가는 나의 기억이 다시 생각날까'. 가사는 아마 한가인의 입장에 더 가까운 듯 하다. 기억을 더듬으며 너무 늦게 알아버린 15년 전의 진실, 그 때문에 서로는 다른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아쉬움. 그런게 인생인듯 하다. 혹시나 둘이 잘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는 모르는 일이다. 오히려 헤어졌기 때문에 더 애틋하고 추억으로 남는 것이 아닐까?

  영화 '동감'과 내용은 다르지만 그 영화의 감동이 그대로 밀려온다. 집을 다 짓고 나서 엄태웅과 한가인이 밤에 새로 넓힌 거실에서 바다를 보며 맥주 한 잔을 한다. 나도 오늘은 그냥은 못 잘 것 같아서 맥주 두 캔을 사서 집으로 들어갔다. 뭐 꼭 사연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냥 영화를 보니 그러고 싶다. 내 정서와 아주 잘 맞는 영화를 오랜만에 본 듯하다.

 

  정릉에 살지는 않았지만 그 동네가 익숙하다. 정릉독서실은 본 것 같고, 정릉시장과 정릉은 가 본적이 있고. 여러모로 익숙한 장소가 많이 나온다. 어머니를 홀로 두고 떠나야 할 엄태웅이, 예전에 자신이 발로 차서 찌그러진 녹슨 대문을 보고 어머니 생각에 우는 모습은 정말로 마음이 짠하다. 

  시간을 내서 제주도에 가보련다. 지붕위에 맨발로 걷다가 드러누워 바닷바람 맞으며, 기억의 습작을 들으며 곤하게 잠들고 싶다.